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인식 (문단 편집) == 당시 한국군에 대한 인식 == 6.25 전쟁 당시 한국군에 대해서는 무능하고 형편없는 군대였다는 인식과 대단히 유능하고 효과적으로 싸웠다는 상반된 인식이 공존하고 있다. 무능하다는 이미지는 전쟁 발발 단 3일만에 수도가 함락되거나 현리 전투의 실패에서 기원하는 것이며 유능하고 잘 싸웠다는 평가는 백선엽 등 몇몇 장군들의 활약상을 강조하면서 나온다. 하지만 실제 전쟁 수행을 보면 한국군은 모든 면에서 무능하지도 않았고, 모든 면에서 유능하지도 않았다는 중립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다. 대한민국 국군이 무능하다고 평가하기 어려운 이유는 전쟁 초기 국군이 보여준 장병들의 희생정신과 전투력 때문이다. 예를들어 1950년 6월에 있었던 [[김포반도 전투]]의 경우에는 [[계인주|사령관 도주]], 사령관대리가 자살하는 등 지휘부가 무너진 상황에서도 전선을 유지했다. 당시 긴급히 마련된 시흥사령부도 영등포 축선방어에만 신경을 세웠기 때문에 김포지구를 컨트롤할 수 없었다. 김포지구는 장병들의 힘으로 지켜낸 것이다. 국방부에서도 '''장병들의 감투정신과 희생정신이 가히 경이적이라고 평가'''된다[* [[https://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401080329167360.pdf|6.25전쟁사(3)한강선 방어와 초기 지연작전, p.228]]]고 언급한다. 또한 전쟁초기에 전방에 배치된 국군 부대의 연대장 및 사단장 등 지휘관들은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한군의 전면남침이 그렇게 감행되리라고 판단하지는 못했으나, '''초기 전투에서 그들이 보여준 지휘력은, 군 수뇌부가 직접 관여한 의정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우수한 편이었다.'''[* [[https://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7010458300150.pdf|6.25전쟁(2) p.97]]]라고 평가하였으며, '''초기 전투과정에서 나타난 일선 지휘자들의 지휘는 필사적이었고 헌신적이었다.'''[* [[https://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7010458300150.pdf|6.25전쟁(2) pp.97-98]]]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거기에 낙동강 전선에서 [[다부동 전투]]도 전쟁 초반인 1950년 8월에 있었던 일이다. 이처럼 전쟁 초기 국군장병이 희생정신은 정말로 경이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군이 우수했다고 하기도 좀 문제가 있는데 한국군의 방위 준비태세는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모든 면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전시내각이나 전쟁지도부에 대한 편성 및 운용계획이 전혀 수립되어 있지 않았고 그 결과 전쟁 상황을 고려한 국가차원의 통합방위계획이나 이를 기초로 한 국가차원의 동원 및 전쟁연습은 정부수립 이후 한 번도 시행되지 못했다. 한국군 방어계획의 수립[* 한국군의 방어계획은 1950년 3월 25일 한국군 방어계획인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를 확정하고 이를 국군방어계획을 하달하여 시행토록 하였다. 국군방어계획은 적의 주공이 철원-의정부-서울 척선에 지향될 것으로 판단하고 의정부 지구에 방어중점을 두고 방어지대를 편성하였다. 방어목표는 이 지역으로 공격해 오는 적의 주공을 진지전방에서 격파하여 38도선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38도선 확보를 위한 국군 방어계획의 기본개념은 다음 3가지로 구분하여 계획하였다. 첫째, 옹진지구의 육군 부대는 적의 공격시 인천으로 철수하는 것이었다. 둘째 개성지구의 육군 부대는 적의 공격을 받으면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설정된 임진강 남안의 방어선으로 철수하고, 기타 다른 부대는 계속 지연전을 실시하도록 계획하였다. 셋째, 후방지역 예비사단은 적의 공격시 역습부대로 운용되도록 계획되었다. 후방지역의 경계는 경찰과 청년방위대 등으로 후방경계부대를 편성하여 관할 지역내의 해공군 부대와 협조하여 후방지역작전을 수행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러나 38도선에서 적의 공격을 저지하지 못할 경우에는 남한 지역의 큰 강을 지용하여 지연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https://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7010348220500.pdf|6.25전쟁사(1) 전쟁의 배경과 원인 pp.641-642]]]이 전쟁발발 3개월 전에 작성된 관계로 예하부대 지휘관 및 참모들이 이를 이해하고 부대에 적용할 시간적 여유가 거의 없었고, 방어시설을 마련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거기에 육군총참모장의 임무 및 지휘 폭이 너무 광범위했다. 육군총참모장은 전쟁 발발 후 국무회의 비상회의, 비상국회, 군 원로회의, 군 수뇌회의, 국방수뇌회의 등 정부, 국회, 국방부회의 참석, 전황을 파악하기 위한 전선 지도방문, 그리고 전국에 산재해 있는 8개 사단에 대한 직접 지휘 등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그 임무가 너무 많고 부담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육군총참모장은 자신의 고유임무인 전선 상황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지휘 결심을 하여 전선의 각 부대에 지시해야 될 적시적절한 지휘 조치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거기에 전쟁 불과 1개월 전에 단행된 군 수뇌부에 대한 대폭 인사개편[* 채병덕의 큰 실수라 지적되는 이것도 사실 너무 과도한 비판이기도 하다. [[채병덕]]조차도 '''1950년 4월 10일에 임명되었다.'''], 주요 지휘관의 교육파견, 전쟁 전야 재경부대 지휘관 및 참모들의 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회식 및 부대별 평균 1/3에 달하는 장병들의 외출, 외박, 휴가조치, 그리고 38도선 방어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전방 사단 연대급 부대에 대한 전후방 교체는 가장 중요한 개전 초동단계에서 신속히 조치되어야 될 사항들이 지연되거나 무시됨으로써 초전 효율적인 즉응태세에 막대한 혼선을 불러왔다. 공비토벌로 인한 효과적인 교육훈련 미실시, 정확한 대북정보를 알고 있으면서도 적의 정확한 남침 의도 및 시기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수집한 정보를 안일하게 대처한 군 수뇌부의 판단 능력 결여가 전쟁을 불러왔다. 즉 전쟁 직전까지 국군이 안고 있는 제도 및 운영상의 모든 결함 및 문제점이 전쟁 발발 당일 한꺼번에 총체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https://www.imhc.mil.kr/user/imhc/upload/pblictn/PBLICTNEBOOK_201307010458300150.pdf| 6.25전쟁사(2) pp.783-784]]] 거기에 가장 심각한 것은 전시에 통합적으로 관리할 조직이나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특히 전쟁으로 인한 병력육성이 필요한데 당시 국군의 병력육성프로그램은 개차반이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1951년 초에 있었던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그리고 이러한 신병교육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분명 김포반도에서 그렇게 치열하게 버텼던 국군이 1951년에는 중공군이 나타나기만 하면 도망갔다.[* 재미있는 것은 북한군도 이러한 병력동원능력이 부재하여 1951년 이후에는 중공군이 주력이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전투를 미군이 치렀다는 인식은 틀렸다. 유엔군의 지원이 전쟁 수행에 필수불가결했음은 분명하지만, 한국군이 연합군의 대다수였음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공산진영의 경우 참전한 장병 수로 보았을 때 주력은 대체로 중공군이었다.] 한국군이 유엔군의 도움 없이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다면, 유엔군 역시 한국군 없이는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다. 한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서 [[다부동 전투]], [[영천 전투]], [[용문산 전투]], [[금성 전투]] 등 수많은 격전을 치렀고, 이 중에는 전략적으로 결정적이었던 전투가 충분히 많다. 한국군은 다부동 전투에서 북한군의 작전적 주공을 저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고, [[평양 탈환작전]]에서는 반격의 선봉을 맡았으며, 용문산 전투에서는 중공군의 공격을 멋지게 받아쳐 후속편인 파로호 전투에서의 대승으로 중공군 춘계공세를 끝장냈다. 물론 [[사창리 전투]]나 [[현리 전투]]처럼 처참한 패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길어지는 전쟁에서 쌓인 실전경험과 고지쟁탈전 와중에도 밴플리트 장군의 주도로 후방에서 실시된 대대적인 교육훈련 프로그램 덕분에 한국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졌다. 이를 입증하는 것이 6.25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 중 하나인 [[백마고지 전투]]와 6.25 최후의 대규모 전투인 [[금성 전투]]다. 백마고지 전투에서 한국군은 중공군 내 정예부대로 평가받던 제38군을 격파하고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백마고지를 사수했으며 금성 전투에서는 초반에 수적으로 압도적인 중공군의 맹공격에 밀려났지만, 이전처럼 쉽게 무너져 패주하지 않고 끈질기게 지연전을 펼치는 등 중공군에게 엄청날 출혈을 강요하여 공세종말점을 앞당겼다. 그리고 다량의 차량으로 예비대를 투입하여 기동방어를 시도하는등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실전경험 외에도 미국의 물적, 기술적 지원[* 현지 유학이나 특수 훈련 과정 등등. [[이종찬]] 장군도 미국 유학을 다녀왔으며, [[전두환]], [[차지철]] 같은 이들도 레인저 스쿨에서 훈련받은 경력이 있다. 이런 국군의 교육 훈련 지원 분야에서 크게 활약한 사람이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다.] 역시 큰 기여를 했다. 베트남 전쟁에 한국군이 참전하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이런 한국전쟁으로 단련된 한국군의 실력을 미국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에 있다.[* 당장 그 채명신 장군만 하더라도 한국전쟁에서 유격전 노하우를 쌓았다.] 한국군은 한국전쟁 과정에서 신생국 군대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지리멸렬한 모습을 여러번 노출한 것은 사실이며, 국군의 전쟁준비가 최악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국군은 다부동 전투, 춘천 전투, 김포반도 전투 등 전쟁초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점도 사실이다. 이후 전쟁중반에 국군은 현리전투 등 대패와 같은 졸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고, 전쟁 후반 백마전투에서 뛰어난 공헌을 세우기도 했다. 이처럼 국군의 전투력은 단순히 초기에는 무능 후기에는 유능이라고 평가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다. 또한 전쟁후반까지 미군이 주력이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전쟁 후반에 국군의 전투력이 유능했다고 평가하기도 어렵다. 결국 당시 한국군의 전투력은 유능과 무능이 복합적으로 섞여있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본다. 물론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고도 결국 공산군에게 나라를 내준 남베트남군과 비교한다면 어쨌든 국토방위에 성공한 한국군은 결과적으로 충분히 유능했다고 볼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